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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 단청 공부

호랑이 나라의 민화, 까치와 호랑이 호작도(虎鵲圖)

by 아오_ 2022. 5. 13.

맹호도
맹호도, 용맹한 호랑이, 국립중앙박물관

호작도 호랑이가 많이 살아 호랑이 나라로 불렸던 우리나라에서 호랑이에 대한 역사, 상징, 의미를 살펴보고 이 그림에 함께 등장하는 까치의 상징에 대해서도 알아보겠습니다. 첨부한 까치와 호랑이 그림에 대해 알아보고 호랑이와 관련된 기타 사항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호랑이 나라

호랑이는 예로부터 우리 민족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멸종되었지만, 옛날에는 호랑이가 정말 많이 살아서 우리나라를 호랑이 나라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고조선 건국 설화에 곰과 호랑이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하얀 호랑이는 고구려 벽화의 사신도에 그려진 것처럼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서쪽을 상징하는 금(金)에 해당합니다. 땅을 지키는 12마리의 수호 동물 십이지신(十二支神)에게서도 호랑이가 등장하는데 인(寅)은 호랑이를 뜻합니다. 아주 먼 옛날을 의미하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떡 하나 주면 잡아먹지 않겠다는 호랑이가 나오는 해님과 달님의 설화에도 호랑이가 등장합니다. 다른 설화에서는 호랑이가 어미 까치를 협박하여 까치 새끼를 잡아먹다가 결국 토끼의 꾀에 속아 넘어가는 불에 달궈진 돌떡을 먹었다는 해학적인 호랑이의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마스코트로 호랑이를 모티브로 호돌이가 탄생하였으며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에는 하얀 호랑이 백호를 형상화한 수호랑(Soohorang)이 탄생했습니다. 인기도 폭발적이었습니다. 지금은 비디오가 많이 사라졌지만 1980년대부터 90년대에는 비디오테이프를 재생하면 호환 마마 전쟁 등이 무서운 재앙이라는 내레이션이 경고하듯 흘러나왔습니다. 여기서 호환(虎患)이란 호랑이에게 화를 당한다는 의미로 사람과 가축이 호랑이한테 해를 당했는데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그 피해에 대해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수백 건이 넘는 피해가 기록될 정도로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조선 중기 세조 때는 호랑이가 창덕궁 후원에 나타났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출몰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조선에서 1년의 반은 호환 때문에 문상을 다니며, 나머지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사냥을 다닌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무서운 존재로의 호랑이는 그 힘으로 신성한 모습으로 승화되었습니다. 고려부터 조선 시대 성종 임금까지 형성된 문화와 역사, 지리, 민간의 풍속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룬 책인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의하면, 명절의 이른 새벽에 호랑이 그림이 악귀의 침입을 막는다는 풍속이 전해집니다. 털 짐승의 우두머리이며 지상에서 가장 힘이 센 동물의 상징으로 지상의 잡귀를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영적인 힘을 지닌 동물을 의미하는 '영물'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민화에서 산신은 일반적으로 백발의 노인으로 그려지는데 호랑이를 타거나 기대어 있거나 쓰다듬는 등 호랑이와 함께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호랑이는 산신(山神)의 사자(使者) 또는 화신(化神)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산신(山神) 같은 의미로 산군(山君)으로 묘사되는 호랑이는 마을의 수호신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인기가 많은 명작 판타지 웹툰 호랑이 형님(Brother Tiger)도 호랑이를 신성한 산군(山君)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유물로는 호항이 형상을 한 호자(虎子, Hoja)라고 하는 남성이 사용하는 이동식 변기로 추정되는 유물이 있습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것 같은 형상으로 7세기에 삼국시대 백제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2. 민화 속에 담긴 호랑이의 상징적 의미

조상들은 호랑이의 모습이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무섭지만 귀한 존재로 신성한 동물로 받아들였습니다. 호랑이는 산의 정령인 《산신(山神)》이자 마을의 수호신을 의미합니다. 신년에는 호랑이가 액을 막는 의미가 있어 궁중은 물론 사대부들의 저택에도 일반 서민들의 집에도 호랑이 그림을 대문이나 집 안에 걸거나 붙여 악귀나 잡스러운 귀신의 침입을 막는 풍습이 전해집니다. 조선 시대 단오와 추석과 같은 명절과 세시풍속(歲時風俗)을 정리한 책인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민가에서 벽에 닭과 호랑이 그림을 붙여 악귀를 물리치고 좋은 일만 생기기를 바랐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호랑이 털 가죽을 신부의 가마에 덮은 풍속도 있는데 역시 잡스러운 귀신을 물리친다는 의미로 행해졌습니다. 호랑이 민화는 정리해보면 축귀(逐鬼, exorcism)나 구복(求福, 복을 바라다)의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3. 까치의 상징

까치는 예로부터 복을 가져온다는 의미를 지닌 새로 조선 시대 풍속을 정리한 책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기록에 따르면 설날에 이른 아침 가장 먼저 까치 소리를 듣는 사람은 새해에 운수가 좋다고 하여 까치를 길조로 생각했습니다. 6살 정도의 지능을 가졌다고 알려진 까치는 상상의 동물 봉황과 함께 비공식적으로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새로 알려졌습니다. 음력 7월 7일 1년에 한 번 까마귀와 까치가 은하수에 날아올라 서로의 몸을 맞대어 다리를 만들어(오작교, 烏鵲橋)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만나게 하였다는 설화에도 등장합니다.

4. 까치와 호랑이

우리나라 민화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그림인 까치와 호랑이는 「호작도(虎鵲圖, The Painting of a Tiger and a Magpie)」, 「작호도(鵲虎圖, Tiger and Magpie)」라고 불렸습니다. 일반적으로 소나무가 배경으로 들어가고 소나무의 나뭇가지에 까치가 앉아있으며, 호랑이가 그런 까치를 나무 아래서 쳐다보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 민화(folk painting)입니다. 그림의 시초는 원나라와 명나라의 호랑이 그림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명나라의 호랑이 그림은 입체적이면서 사실적으로 그렸다면 한국적으로 해석된 호랑이 그림은 평면적이고 추상적인 그림으로 탈바꿈하였습니다. 17세기에는 배경처럼 등장했던 까치는 역시 시간이 흘러 19세기에는 호랑이와 함께 주인공으로 표현했습니다. 호랑이의 모습은 초기에는 위풍당당하게 표현되었다가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익살스럽게 표현되었습니다. 민화에서 초반에는 무섭게 묘사되었던 호랑이가 어떻게 익살스럽게 바보 호랑이로 변해갔는지 의문이 듭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당시 사회의 모습에서 알 수 있었는데 조선 후기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심해 서민들이 먹고살기가 더 어려웠습니다. 탐관오리를 호랑이로 생각했고 동학 혁명이 일어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 서민들은 탐관오리의 횡포에 맞서는 모습을 작지만 매우 영리한 까치의 모습을 위에 언급한 불로 달군 돌로 만든 떡을 먹은 어리석은 호랑이가 등장하는 설화에서 차용하여 민화 속에 투영했습니다. 그림 속에서 까치는 호랑이를 피해 나무 위에 올라가 앉아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맹수로서의 위엄이 사라진 호랑이를 놀리는 것 같습니다.

5. 호랑이와 관련된 다른 이야기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란 오래 된 옛날을 의미하는데 담배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6세기 말 임진왜란 전후로 일본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담배 피는 호랑이 벽화는 수원의 팔달사 벽화로도 남아있습니다. 단오(端午)에 먹는 쑥으로 만든 떡을 쑥호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명절 중에 단오(端午)에 나쁜 것을 물리친다는 의미로 호랑이 모양으로 쑥으로 만든 떡을 만들어 먹었다고 전해집니다. 이것을 애호(艾虎)라고 합니다.

호작도 까치와 호랑이 작품
호작도 까치와 호랑이,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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