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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 단청 공부

한국 단청의 정의와 발생 요건 및 목적과 역사

by 아오_ 2022. 8. 25.

낙산사_단청
낙산사 단청 픽사베이

한국 궁궐과 사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단청에 대해 공부를 시작해 보려 합니다. 오늘은 단청의 정의와 이것이 발생한 요건,목적, 역사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1. 단청의 정의와 발생 요건

단청은 사찰, 궁궐, 사당과 같은 나무로 만든 건물에 여러 가지 색으로 그림과 무늬를 그려 장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큰 범위로 보면, 예로부터 왕실이 나라의 길하고 흉한 일과 관련된 의식과 종교, 신앙과 관련된 의식을 하는 건물의 의식에 사용되는 도구 등을 엄숙하게 꾸며 일반 건물이나 일반 도구와 구분하기 위해 꾸미는 것을 뜻합니다. 나무로 건물을 만들었던 동아시아 건축 문화권에서 반드시 필요했던 단청은 한국, 중국,일본을 중심으로 발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2. 단청의 목적

단청의 목적을 살펴보면, 첫번 째는 건물의 영구적인 보존을 위한 목적입니다.이것은 단청 칠하는 가장 큰 목적으로 건물의 부식을 방지하고 충해를 막아 영구적인 보존을 위한 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두 번째는 재질이 조악해 보이는 것을 은폐하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내구성이 좋고 잘 썩지 않는 소나무를 사용하여 궁궐과 사찰 건물의 건축재로 사용했습니다. 건축 자재로 사용한 소나무의 표면은 거칠었고 열상이 커서 이것을 은폐하기 위해 표면을 도장하는 방법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이 방법은 단청의 세 번째 목적인 궁전의 위엄과 사찰에서 부처님을 모시는 법당의 장엄을 위한 목적으로 연결됩니다. 이것은 건물을 더욱 아름답고, 장엄하게 보여 품격을 더하여 건물 주인의 권위와 위엄을 돋보이게 했습니다. 이와 같은 단청의 목적은 상호 보완을 목적으로 적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3. 단청의 역사

우리나라 단청의 역사는 고구려 357년에 조성된 황해도 악안 3호분 고분 벽화에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고분의 벽화에서 수준 높은 단청 양식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 벽화에 표현된 고구려 건축 양식은 고려나 조선시대 목재 건축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웅장하고 화려하게 단청으로 꾸민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분 벽화에 나타난 기둥 그림에 각종 무늬를 그려 넣은 것이 보이며, 화려한 당초무늬가 들어갔습니다. 특히, 인동당초문 장식은 아라비아풍의 화려한 당초무늬인 아라베스크 영향을 받은 중국의 서쪽 나라들의 기둥 장식과 조형적으로 동일한 이미지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백제 25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의 베개에 붉은색으로 단청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청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 제48권에 솔거라는 화가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신라 24대 왕인 진흥왕 때 화가인 솔거가 황룡사 벽에 늙은 소나무를 그렸는데 가끔 새들이 날아와 앉으려고 하다가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후에 색이 바래서 절의 스님이 단청으로 보수하자 새들이 날아오지 않았다는 기록입니다. 삼국유사에는 황룡사 9층 탑과 관련하여 탑에 대해 찬사를 쓴 글에 금벽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나무로 만든 탑에 화려한 단청이 채색된 것으로 최상급의 단청을 뜻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고려시대 단청에 대해서 고려사라는 책에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고려사에 따르면, 거리에 단청으로 채색한 큰 집들이 줄을 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고려시대 단청이 일반 집에도 크게 유행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입니다. 조선 시대의 단청과 관련한 역사적 기록은 조선왕조실록과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며, 조선왕조실록에 태종 왕부터 철종 왕의 재위 기간에 159건에 이르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조선 시대에 불교를 배척하는 일로 인해 사찰의 단청은 줄었지만, 궁궐과 왕실의 불사 단청은 계속되었습니다. 단청에 사용된 안료가 대부분 중국에서 비싸게 수입된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많이 나타난 기록은 사찰의 값비싼 진채 단청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상소와 관련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궁궐 단청의 화려함과 이것을 지적하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 초부터 사찰과 일반 집에 단청이 법으로 금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상류층 저택과 사찰의 단청을 반대하는 유생들의 향교와 서원에도 단청이 화려하게 들어간 것이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향교는 조선 시대 유교를 교육하기 위해 국가가 지방에 설립한 교육 기관을 의미합니다. 한편 단청은 조선 전기를 지나면서 궁궐과 사찰의 단청은 점차 퇴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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